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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작성일 : 2018-12-04 / 조회 : 4,677
[일본 장보고(백제인)유적답사...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 하카다 구마모토 오사카 교토 등을 둘러봐

 글쓴이 : 운영자

일본 장보고(백제인)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김성훈 재단이사장(전 농림부장관)과 정송균 재단부이사장, 김호성 전 서울교대 총장 등을 포함한 답사단원 14명이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하카다항을 출발하는 카메일리아호 갑판에 승선하는 것으로 답사일정을 들어갔다. 

일본 장보고(백제인)유적답사단이 하카다항에 내려 가장 먼저 찾은 홍로관 유적지. 일본의 관문인 이 유적지는 장보고상단을 비롯한 외국의 사절단이 묵을 수 있도록 영빈관으로 활용된 곳. 야구장으로 사용하던 이 곳이 1987년에 발견된 복원했다. 화장실에 출토된 음식물 쓰레기를 조사하여 밥상을 만들어 놓은 장면이 눈에 띈다.  두번째 찾은 곳은 다자이후시의 대재부이다. 대재부는 대왕(천황이전의 야마토 정권을 다스리는 왕)이 직접 통치한다는 관청이다.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 따르면 의자왕의 딸인 제명여제가 660년에 망한 백제를 구하기 위해 나고야 오사카 등에 정착한 구 백제인(야마토에 선진문물을 전수하기 위해 일본열도로 이주)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도를 이곳으로 천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중에 죽었다. 그녀의 아들 중대형 왕자는어머니의 유훈을 이루기 위해 왕위에 오르지 않고 망한 백제를 구하기 위해 663년에 전함 1000척과 병력 3만2천명(일설에는 4만명)을 파견했다.

이들 병력은 백촌강에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몰사당했다. 남은 전함 10여 척에 백제의 기득권을 가진 귀족 등 수많은 백성들이 모진 고생끝에 일본으로 건너왔다. 이들 중에 야마토 교육부장관에 오른 귀실복신의 아들 귀실집사 등이 있다. 이들을 신백제인이라고 부르자. 중대형 왕자는 백제를 구하지 못하자, 왕위에 올라 천지천황이 되었다. 그는 이들 세력을 규합하여 통일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본을 처들어올 것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였다. 대재부 앞에 수성(현재 남아 있는 유구는 1.2km)을 건축하였고 대야성 등 2곳의 백제식 산성을 쌓았다. 천지천황은 당과 신라 연합군이 처들어 올 것에 대비하여 수성과 도성, 피난 산성 등 3가지 대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세번째 찾은 곳은 나당연합군에 패한 야마토 백제구원군의 일부와 기존의 한반도에서 건너왔던 가야 및 백제, 신라, 고구려 이주민들이 협력하여 건설한 백제식 산성인 기쿠치성을 견학했다. 성곽의 둘레가 3.5km, 면적이 55만km2인 이 산성은 팔각형 고루와 창고, 병영, 무기고 등이 복원됐다. 백제식 산성 중 가장 복원이 잘되어 있으며 2004년에 국가유적으로 승격됐다.일본 천황들이 이곳을 방문, 기념식수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일본 장보고(백제인)유적답사 이틀째 마지막 일정은 벳푸에서 오사카를 가는 선프라워호에 승선했다. 이 배는 일본의 중심부인 혼슈와 시코쿠, 규슈사이에 잇는 세토내해를 지나간다. 20일 오후 7시 넘어 출항한 배는 21일 오후 6시까지 쉼없이 항해를 계속했다. 얼마나 긴 항해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세토내해의 길이를 확인했다. 동서를 잇는 길이만 450km, 남북의 길이는 15~55km이다. 그동안 막연하게 좁은 해로로 생각했는데 갑판에서 바라본 세토내해는 완도와 청산도 사이만큼 넓었다.나는 오래전부터 세토내해를 지나가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온갖 일본의 역사를 간직한 지중해였기 때문이다. 세토내해는 히로시마 고베 오사카 등 유서깊은 고도들과 함께 일본의 각종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토내해는 규슈와 교토를 연결하는 해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었던 문명의 길이기도 하다. 특히 가야와 백제 등의 이주민들이 이 내해를 지나 오사카, 나라, 교토 등지로 가서 정착했다. 조선통신사들도 세토내해를 걸쳐 만들어진 도카이도를 통해 에도로 들어갔다. 

 

오사카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오사카부 후지이데라시(등정사시)에 있는 가라쿠니 신사였다. 가라쿠니 신사의 한자음이 한국의 한이 아니라 맵다를 의미하는 신이었다. 이는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지배를 할 때 한국과 관련된 신사의 명칭을 변경시켰던 것이다. 이 신사의 설립 배경에 대해서 3가지 설이 있다. 우선 고대 일본에서 양대 가문이었던 모노노베의 조상신을 모셔다는 설이다. 내가 아는 모노노베가문은 일본 토착가문이다. 쇼가 가문은 백제에서 건너가서 도래인으로 100년간 재상을 배출할 정도로 명문가문이다. 모노노베가문이라는 설은 10세기에 지어진 율령에서 기인된다.

두번째 설은 백제계 신사라는 것. 우선 이곳은 백제라는 명칭이 많은 곳. 가와치(하내국) 마을이 있었다. 재일동포 재야학자로 유명한 김달수 선생이 쓴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동아일보사)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역병을 다스리는 신을 모셨다고 주장했다. 세째는 가야출신으로서 최고의 신분을 모셨다는 주장이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는 가야출신의 최고 신분에 오른 사람을 받들어 모신 신사라는 것이다. 최근 백제역사학자로 유명한 양기석 노중국 정재윤 교수가 펴낸 가와치 등에는 곤지가 461년에 왜에 파견되어 가와치 지역에 정착한 뒤 백제와 왜의 군사적 협력체계를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가와치 지역에는 백제인들이 만들었다는 제방과 제철, 사찰, 고분 유적이 산재해 있다. 이밖에 주변에 4세기부터 6세기 중엽에 형성된 전방후원분 등 한반도 고분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백제계 신사로 봐야하지 않을까.

일본 장보고(백제인) 유적답사단이 사야마지와 사야마지역사 박물관을 방문했다. 사야마지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댐식 저수지이다. 616년에 백제의 토목기술로 만들어진 게 특징이다. 700년대에 지진으로 파괴된 저수지를 행기 스님(한반도 출신으로 동대사를 건축한 공사감독)이 보수를 한 이후 여러차례 증축을 거쳤다. 1704년에 대공사를 거쳐 4200ha 에 물을 공급했다. 1988년부터 10년 대개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저수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저수지가 백제인이 만들었다는 것은 낙엽을 흙과 섞어서 제방을 쌓는 부엽공법을 활용한 것이다. 부엽공법은 김제 벽골제 제방을 쌓았던 공법과 일치한다. 이처럼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사야마지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아마노천과 미즈가야천 등이 범람하거나 수량이 부족했을 때의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했다. 사야마지 옆에 일본으 대표하는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가 1982년에 설계한 사야마 지역사박물관은 제방축조된 단면을 그대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저수지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고야산에 자란 나무로 물이 흐르는 관을 사용한 점이 특이했다. 1400여년의 저수지 축조 역사가 쌓여 있는 사야지마를 보면서 백제인들이 고대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수해줬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장보고(백제인)유적답사단이 네번째 찾은 곳은 나라의 백제사였다. 이 사찰은 일본서기에 등장할 정도로 유서가 깊다. 34대 서명천황은 11년(서기 572년) 7월에 백제천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백제대궁을, 동쪽에는 백제대사를 지었다고 한다. 다만 오늘날 백제대사의 건물은 없어지고 대사터만 발굴되었다. 백제대사는 39대 천무천황이 대진(근강)에서 나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나라로 옮겨온 뒤 대안사라는 사찰로 바꿨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제사는 오사카와 사가현 등 5곳에 세워져 있다. 나라현 북갈성군 광릉정에 위치한 백제사의 입구에 있는 마을 우편국의 이름도 백제를 담고 있다. 백제대사 인근에 백제사 공원에는 백제사 3층탑만 남아 있다. 왼쪽에는 한반도 관련된 여러 신사를 합쳐 놓았다. 다만 신을 모신 사당은 열쇠로 잠겨놓았으며 건물안은 텅비어 있었다. 백제사가 있는 곳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백제사 건물 옆에는 백제공민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백제이주민들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백제사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면서 쇠잔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일본 장보고(백제인) 유적답사단은 21일 다섯번째 방문한 곳이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이다.

일본 아스카의 최고로 인정받는 고분 벽화 이다. 이 벽화는 고구려 벽화와 닮았으며 주변의 고분은 가야와 똑같다는 점에서 일본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여인군상과 사신도가 등장하며 주름 잡힌 치마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고구려 여인들의 복장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상당히 닮았다.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카마쓰 고분은 구릉의 남사면에 만들어진 원분으로, 1972년 3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묘실(墓室)의 크기는 길이 2.65m, 너비 1m, 높이 1.13m. 다카마쓰 고분의 돌방 내부는 도굴됐지만 고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점에 있다.

돌덧널 내부는 전면에 회칠을 했고, 천정 및 벽 측면에 성수⋅일월⋅사신⋅인물군상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정부의 거의 중앙에는 길이 약 0.9㎝의 원형 금박을 칠하고 붉은 선으로 별자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는 중앙 상부에 금박의 일상과 그 밑에 청룡, 남⋅북에 남녀 각 4인의 군상이 그려져 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군상은 법륭사(호류사) 금당에 그려진 벽화에서도 어느 정도 연관된 무늬를 엿볼 수 있다. 이 벽화는 중국이나 한반도로부터 전래된 회화 기법을 기반으로 하고, 새로운 당대 회화의 양식도 채용하여 일본 독자의 화면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