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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작성일 : 2018-02-06 / 조회 : 340

[최근식 교수],2017 중국 장보고(신라인) 유적 답사기

 글쓴이 : 관리자

장보고대사 신라인 관련 중국지역 2017년 답사기

 

최근식((사)장보고글로벌재단 이사, 전 고려대 연구교수)

 

 

 (사)장보고글로벌재단 주최 해외답사에 참여한 두 번째 여행이었다. 지난 해 12월 일본 오사카 쿄오토 지역 3박 4일 답사 여행에 이어, 이번에는 중국 동해안 신라인과 장보고대사 관련 지역을 8월 14일(월) 옌타이(烟台)공항 도착부터 21일(월) 상하이 푸동(浦東)공항 출발까지 7박 8일 동안 다녔다. 전과는 달리 특별한 문제점이 보이지 않아서 이번 답사기는 생략하려고 했는데, 단장인 전 농림부장관 전 상지대학교 총장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농훈 김성훈 이사장 선생님께서 9월말까지 뭐라도 무조건 써내라는 엄명을 내려서 할 수 없이 기억을 짜내어, “사슴을 말이라” 하지 않고,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써보려고 한다.


첫날 비바람 속에서 봉래각을 둘러봤을 때 처음부터 기분 좋은 일이 하나 있었다. 가이드 김성일 사장님이 봉래각 입장권을 나눠 주고 있기에 “최근식이도 한 장 주시오” 했더니, “만 70세 이상이므로 표가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여권만 보여주고 들어가세요”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웬 떡이냐, 몇 년 전에는 없더니만 중국도 이제 경로우대 정책을 펼치는 구나, 나한테 잘 해주므로 참으로 좋은 나라다,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어쨌든 공짜로 들어가라고 하니 순간적으로 너무 기뻤다. 그래서 줄을 서가지고 쇠 분리대를 따라 들어가는데, 김덕수 교수님이 분리대 밖에서 손으로 철봉을 잡고 있기에 “김교수님, 들어갑시다, 우리는 공짜라고 하네요” 했더니 답하기를 “몇 달 모자란데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교수님과는 약 20년 전부터 면식이 있었는데 계속 본인과 동갑인 줄 알고 깍듯이 대했었다. 그런데 ‘몇 달 모자란다’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봉변이란 말인가. 곧바로, “나이도 어린 것이, 쯧쯧쯧 - - - , 그러면 인자부터 말 놓겠네 잉, 덕수 아우야”라고 말하려고 돌아봤더니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저녁에 호텔 체크인 때 룸메이트로 배정되어 7박 동안 같은 방을 사용했는데 덕분에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대외 정치, 경제 등 많은 것을 배웠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다음 바로 옆에 있는 봉래고선박물관에 들렀다. 2005년도에는 13~14세기 원나라 시대 전선인 1호선 밖에 없었던 등주고선박물관이었는데 그 후 명나라 시대 선박 3척이 추가 발굴되어 확장 개조하면서 이름을 바꾼 모양이다. 선저, 선수 형태, 모형선박의 돛대 수, 돛 모양, 피수판 장치 등 참고할 사항이 많았다. 해양사 전공자로서 추후 시간을 넉넉히 잡아 재답사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적산법화원에 갔다. 이번이 네 번째다.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 신라해양사연구- (2006년도 대한민국학술원 기초학문육성 “우수학술도서” 선정 및 수상)를 쓰기 위해 2005년도에 두 번 왔고, 그 다음 「적산법화원의 장보고전기관 문제점을 중심으로」(- 한국해외문화유적답사비평-  수록) 글을 쓰기 위해 2012년에 한 번 왔었다. 그 ‘문제점’ 때문에 이후에는 오기가 싫었다. 그런데 또 와서 보니까 한 장면이라도 놓치기 싫어서 열심히 사진 찍으면서 둘러보았다. 이번에 처음 본 것은 ‘적산명신상’ 내부였다. 세 번이나 왔는데 어떻게 그 안쪽을 안 봤는지 모르겠다. 다른 말 할 것 없이 ‘내 인생에 100점은 없구나’ 하고 넘어가는 수밖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과는 김성훈 이사장님이 고 손보기 선생님, 김문경 선생님과 함께 중국과 수교하기 전 1990년 5월에 세운 최초의 장보고기념비 <장보고 대사 적산 법화원기> 위치를 확인한 것이다. 그 후 언젠가 중국관리인들이 없애버렸기 때문에 어느 곳에 세웠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기념비 복원 시에 필요한 일이다. 혹시나 현 <청해진대사 장보고공적비>(장씨 종친회 건립) 위치였는가 의심하기도 했으나 그 위치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성훈 선생님이 기억을 더듬어, 일본인들이 세운 <적산법화원지> 적색 글씨의 큰 기념 바위 옆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모두들 사진을 찍어뒀다. “손가락질 하세요”라고 고함친 사람이 누구였을까? 바로 본 필자가 아니었겠는가! 이런 것이라도 한 몫을 한 셈이라고 자랑 쳐 본다. 원체 알아주지 않는 사람의 표본이다.


다음은 같은 해 위 <적산법화원기> 기념비보다 조금 먼저 즉 1990년 4월 29일 장보고대사해양경영사연구회가 세운 <유산포신라인구거유지> 기념비 발견이다. 감격이었다. 잡목 속에 파묻혀버린 비석을 김성훈 이사장님, 김덕수 교수님, 가이드 김성일 사장님 등이 물어물어서 유산포 부두 공사 업체 사장님의 자가용 차량 인도로 찾아낸 것이다. ‘해락수산’ 건물과 전 고위 관직자 별장 옆 사유지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분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사진 찍는다고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모든 참관자들이 희열에 들떴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여기에서 살고 있었다. 멀리 유산이 바라보였다.

앞으로 우리들이 할 일은 일반인들이 쉽게 답사할 수 있도록 현지 토지소유자와 상의하여 길을 내고 주위를 정돈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강소성 연운항시 숙성향 선산(船山)으로 향했다. 왜 ‘선산’으로 이름 지었는가 하면 산 모양이 마치 선박을 뒤집어 놓은 것 같기 때문이라고 주위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데 필자는 산을 아무리 봐도 배를 뒤집어 놓은 모양 같지는 않았고 또한 동서양 여러 선박박물관, 해양박물관을 둘러봤어도 선박을 뒤집어 전시한 것은 한 척도 보지 못했다. 다만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놀이용 보트들을 뒤집어 놓은 것은 보았지만 말이다. 이런 의문이 들자, ‘이제야 문제를 발견했다, 글 한 편을 쓸 수 있겠다, 아마도 선박을 계류해 놓는 곳, 즉 산 밑의 장소라고 ‘선산’으로 작명했는데 어느 때인가 누가 ‘산 모양이 배를 뒤집어 놓은 것 같아서 선산으로 했다’고 잘못 전했을 것이다’고 추리를 하고는 흐뭇해하면서, 옆에 강봉룡 교수님께 “이제야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선산 이름이 잘못 전해진 것 같습니다, 비평 글을 써야겠습니다, 편집되거나 이 사람들 펄쩍 뛰지는 않겠습니까”라고 자문자답하면서 포부를 발표했다.

그런데 귀국 후 집에 와서 안내판 사진을 읽어보니, “山峦峻峭산만준초 狀如大船상여대선”(죽 잇대어 있는 산들은 높고 험한데 모양이 큰 배와 같다: 필자 역)이라고 적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바라본 산은 바로 앞의 산 하나뿐이었으니 안내판의 ‘죽 잇대어 있는 산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가 막힌다. 헛된 추리, 꿈이었다. ‘쓰레기 input, 쓰레기 output’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이 앞에 산을 보고는 ‘배가 뒤집어 있는 모양’이라고 말하고, 전달하고 있는가 이다. 이것이 ‘불가항’의 군중심리인지, 어떤 현상인지 심리학자에게 물어보아야 할 사항이다.

애당초 혹시 누군가 아는 척하면서 ‘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라고 말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갈 때인가 버스 안에서 가이드 김사장님이 고전 문구를 예로 들면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운운, 공자 노자 만난 사건’ 등을 얘기하는데 핵심적인 뜻이 잘못 설명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 교수님들께서 바로잡아 줄 꺼라 생각하고 한참동안 기다렸는데 아무도 말씀하시는 분이 안 계셨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서 이 부분만은 본인이 확실히 공부한 바가 있으니 바로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는 미천한 신분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 마이크를 잡고는 출전을 얘기하고 바르게 전달했었다. 즉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 논어- , 권2, 爲政)고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그어준 내용이다. 물론 무엇을 모르는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단계일 것이다. 본인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대충 얼렁뚱땅 아는 척 말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즉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는 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닌지. 프로와 아마츄어의 차이는 ‘프로는 모르는 것이 많고’ 아마츄어는 ‘아는 것이 많아서’, 아마츄어는 ‘많이 가르치려 하고’ 프로는 ‘많이 배우려고 한다’는 것이다(최근식 버전). 본인은 아마츄어다. 프로는 ‘모르는데도 묻지 않는 것을 더 부끄럽게 여긴다’는데 대다수가 잘 실천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자가 노자를 만나 거의 모독적 질책에 가까운 꾸지람을 듣는 장면을 보자면, “군자는 덕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겉보기에는 마치 어수룩하게 보인다고 했소. 그대도 그 교만과 욕심, 그리고 그럴 듯한 자태와 잡념을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런 것들은 그대에게 무익한 것들이오. 내가 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라오 … 내가 오늘 만나본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었다.”(君子盛德容貌若愚。去子之驕氣與多欲,態色與淫志,是皆無益於子之身 吾所以告子,若是而已 … 吾今日見老子,其猶龍邪: - 사기- , 권63, 老子韓非列傳제3, 임헌규 역)고 한다.

다시 ‘선산 내력’으로 돌아가 반성을 하자면, 전해진 말을 왜 그 자리에서 안내판을 보면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시간도 촉박했을 뿐만 아니라 중한사전도 가져가지 않았으니 山峦峻峭의 뜻을 알 수도 없었다. 다만 재미있는 추억이 되었고 김성훈 이사장님의 엄명 답사기를 쓰는데 자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으로 분량이 엄청 불었다. 너무 기쁘다.


다음은 1990. 7. 19 ~ 7. 21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 중앙대학교중국연구소 공동 건립 <숙성촌신라인주거유지> 기념비를 탐방했다. 김성훈 단장님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가정집 마당이었는데 그 주인이 사용료 없이 비석을 세우게 했다고 한다. 한국인, 신라인과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마운 분이었다.

그 부근에 <해신 장보고> 한자/한글 석판 명패가 붙어 있고 입구 좌우에 배의 (조)타륜 잡은 장보고, 노 잡은 정년의 제주도 ‘돌하루방’ 형식 입상이 세워진 쉼터가 있었는데 혹시 <해신> 영화 촬영지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옆에 <장보고기념관>을 건립하고 있었다. 연운항시 숙성향은 신라촌 유지와 차(茶)문화, 장보고대사 발자취가 있으므로 이 지역을 해상 운태산 관광구역과 더불어 강소성 5성급 ‘향촌 생태’ 관광 기지 <중한문화원(園)>으로 만들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었다.


다음은 강소성 회안시 연수현 소재 연수대교(현 남문대교), 경항대운하 강소단(江蘇段) 고말구유지(古末口遺址), <신라방유지>, 폐황하회안보류구(廢黃河淮安保留區) 등을 답사하고, 같은 강소성 양주시 당성유지박물관, 최치원기념관, 정몽주 동상, 양주고운하유지, 동문유지, 마르코폴로 기마동상, 마르코폴로기념관 외관, 현재 운행되는 용 두 마리가 선수에서 선미까지 새겨지고 두 개의 이층 누각을 연결하여 건조된 화려한 운하유람선 등을 관람했다. 바라보는 것보다는 배를 타고 옛 물길을 오르내려 보는 것이 더 감회가 깊을 것인데 시간이 없었다. 항주에서 북경까지 이어진 경항대운하의 한 부분이다.


다음은 양자강 다리를 건너 소주 한산사 풍교고운하를 급히 쳐다보고 종소리는 듣지 못한 채 천태산으로 향했다. 천태종의 총본산인 태주 국청사에 들렀다. 일본 천태종 초대 좌주 최징대사의 기념비가 있었다. 그 제자로서 - 입당구법순례행기- 의 저자인 원인스님은 838년 불법을 구하러 당나라에 왔으나 유학(문)승 신분이 아니라 청익승 자격이었으므로 중국 당국의 허가증(公驗)을 얻지 못해 여기 천태산 국청사에는 오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기념비는 없었고, 귀국 후 쿄오토 부근 히에이산 연력사에서 천태종 제3대 좌주로 취임했다.

이튿날 새벽에 다시 뒤쪽 상단 건물을 살펴보니 고려시대 의천 대각국사(1055~1101) 황금동불 모양의 좌상이 있었다. 대각국사는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출가하여 불학을 포함한 제반 학문을 공부한 후 송나라(북송) 수도 변경(현 개봉), 항주 부근 등으로 유학, 귀국한 뒤 개성 국청사(1097년 완공)에서 천태종을 개창, 강의하여 해동천태종의 개조가 되었다.


다음은 영파와 주산군도를 잇는 긴 다리를 건너 주산시에 있는 절강해양대학을 방문했다. 마침 무역학 전공인 김덕수 교수님이 본교에 재직하고 있어서 학장님과 직원들로부터 점심식사 등 환대를 받으며 둘러보았다. 큰 건물들이 즐비하고 여러 학과가 있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발맞추어 해양계의 큰 인물들이 배출될 것으로 느껴졌다. ‘아우야, 단디 하거래이’.

그리고는 페리보트를 타고 보타도로 건너갔다. 장보고기념사업회에서 건립한 보타산 <신라초기념비>를 탐방하고 멀리 보이는 신라초를 기념 촬영했다. <불긍거관음원>은 찾지 못했다. 차기 답사로 미루어야 할 항목이다. 다음은 영파 <고려사관유지>, 수나라 시대 고찰 아육왕사 등을 둘러보고, 영파와 가흥을 잇는 36km 항주만 대교를 지나 상해임시정부구지를 경건하게 답사한 후, 상해 ‘신천지’, 토착 중국식 건물로 이루어 진 ‘예원시장’, 황포강변 야경 등을 구경으로 이번 중국 답사여행을 끝마쳤다.

이번 여행에서, 상기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중요한 구호로서는 ‘이얼쌍’(유영인) ‘개고생’(김풍호) ‘단디바라단디바라’(강병철) 등이 있었다. 기억해두기 바란다.


본 답사여행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감동적’이었다. 무사히 답사여행을 끝마치게 되었음에 가이드 김성일 사장님, 이름 모르는 운전기사님 그리고 이얼쌍 유영인 감독을 비롯한 참가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린다. 참가회원 한 분 한 분 거명하지 않았음과 특히 금품 후원자에 대한 감사인사를 본 답사기에서 논하지 않았음에 대하여 깊은 혜량을 빈다. 실무담당인 황상석 사무총장도 수고했고, 단장인 김성훈 이사장님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총 20명이 우왕좌왕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김성훈 선생님은 장보고대사와 신라인 유적지 확인 및 기념비 건립 작업에서 절대적 역할을 했음도 이번 답사여행에서 실증되었듯이 고 손보기 선생님, 김문경 선생님과 더불어 이에 걸맞는 평가와 예우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보고대사 현양 사업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석도진 적산법화원 경내에는 <장보고기념탑>을 비롯하여 어느 한 곳에도 ‘김성훈’ 이름 세 글자가 적혀져 있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또 천년을 기다려야 할 것인지. 장보고현양사(史)에서 역사적 의의 및 위상을 가지는 최초의 기념비 <장보고 대사 적산 법화원기>를 복원하고 앞에 서술한 <유산포신라인구거유지> 기념비 주위 정리 등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김성훈 이사장님은 장보고대사 기념사업에서 단연히 앞자리에 모셔져야 마땅하다. 건강만 허락된다면 종신토록 이 사업을 맡아주었으면 좋겠다. 감사올린다.